[장세문 칼럼] 강아지 똥과 산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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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문 칼럼] 강아지 똥과 산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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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장세문       작성일 : 2008-05-07 오후 5:38:32 조회 : 153
  100 강아지 똥과 산골아이 -강아지 똥 권정생님의 1주기에-    
 


권정생님은 「강아지 똥」이란 동화로
나는 「산골아이」라는 동시로
우린 1969년에 기독교교육이란 마당에서 만났습니다.
둘 다 흙냄새 산냄새 물소리에 젖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내가 목회 초년병으로 안동에 온 1973년 5월 어느날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가 열린 안동교회에서
“산골아이 장세문 전도사님!
내가 강아지 똥 권정생이시더” 하는 소리로
우리는 얼굴과 얼굴로 만났습니다.
그 때도 벌써 님의 연약한 손엔 따끈 따끈 미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님의 눈은 푸른 산과 맑은 내 그리고
하늘을 꿈꾸는 산골아이처럼 맑으면서도 깊어보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강아지 똥과 산골아이는
김원길 김주영이 이끌어가던 안동문인협회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그 때 안동문학 1호도 나왔습니다.
그 때 안동문인협회의 모임은 주로 토요일 오후 
버스터미널 가까이에 있는 까치집이라는 주점에서 있었습니다.
예수쟁이인 우리는 콜라나 사이다 한 잔을 받아들었지요.
구담 사는 신창호 집사도 함께 하였습니다.
용케도 우리 셋은 모두 장가 못 간 총각들이어서
내가 살던 서부교회 부엌 한 칸 방 두 칸 사택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기도 했습니다.
병골인 님과 약골인 내가 안쓰럽다고
맘씨 좋은 신 집사가 돼지고기 파티도 자주 열어 주었지요.
돼지고기 껍데기에 시커먼 털이 숭숭 있었지만 우린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로 가서 원대소비조합을 운영하며
아동부연합회 영남지회장도 하며
동시집 「어젯밤 꿈 얘기」 동화집 「하늘나라」(?) 도 출판한 막내 신집사가
3남매 어린아이들을 남겨두고 연탄가스 사고로 부인과 함께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동산병원에서 있었던 장례예배에
님은 오지 못했으나 이오덕 교장선생님이 오셔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시던 예수님같이 우시며 조사를 했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신창호 작사 김명엽 작곡의 교사의 노래
“나 위해 죽으신 주 미련한 날 불러 내 어린 양을 치라 부탁하셨으니
이 생명 다하도록 어린양 치리라 주님처럼 목자되어 보살펴 주리라”를 부르며 
신 집사의 신앙과 글쓰기 열정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 때는 중앙고속도로가 없었고 남안동 인터체인지도 없어서
조용하기만 하던 일직 조탑동에서
님은 일직교회 예배당 문간방에서 중을 치며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님이 치는 종소리에 깨어 일어나 들로 나갔고
님이 쓰신 글은 「강아지 똥」과 「무명저고리와 엄마」라는 동화로
산골예배당의 종소리같이 맑은 소리를 한국 문단에 울려 보냈습니다.
30촉 전등이 어두침침하고 쥐똥냄새가 젖어 있던 그 방에서 살면서
어찌 그리 맑은 종소리를 칠 수 있었는지요.
그것은 님이 날마다 기도로 하늘 문을 열고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그 무렵에 나는 님이 종치기 집사로 섬기던 그 교회에서
새벽 낮 저녁 하루 세시간씩 나흘간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그 때 님은 조금은 미안한 듯 조금은 원망스러운 듯 나를 보며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무서운 지옥으로 보낼시껴?” 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물지고 죄 많아도 불쌍히 여기셔서 
모두 모두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듯 했습니다.
강아지 똥도 사랑한 님은 불쌍하고 가련한 모든 인생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님은, 반공 승공이란 명분으로
사정없이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윽박지르던 권세자들은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반공을 권세확립의 보검으로 사용하던 자들은
님답지 않게 미워했습니다. 
그런자들을 비판없이 용납하고 두둔하는 교회도 못마땅해 했습니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새 집을 지어 옮기고
안수집사로 임직도 했지만 교회에서는 조금씩 멀어져 갔습니다.


형제보다 친밀히 지내던 친구 이00 장로를 유행성 출열혈로 먼저 보내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은사충만을 주님의 사랑보다 앞세우는 
목회자나 교회의 풍토가 님의 여린 마음을 멍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님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은 결코 아님을 압니다.
님의 마음은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이면서 진정 주님의 뜻을 모르는
교회보다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였던 것이며 
그 길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금복이네 자두나무가 상도 받고
몽실언니가 TV 연속극으로도 나오고
여러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유명해졌어도
님은 옛 날 그대로였지만
아동부 교사 동화대회에서 심사를 같이 하고
육사 백일장에서 글을 함께 골라보던 그 때같이 
우린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도 갔습니다.
“우리 옥자 잘 있니껴? 잘 사니껴? 잘 하니껴?” 
먼저간 친구의 딸을 자기 딸같이 생각하고 안부를 묻던 일도 잊혀져 갔습니다.

지난 해 그 날
님이 좀 더 아프고 힘들어 할 때마다 무엇이든지 도와주려던
우리집 장영자 전도사가 “권정생 집사님이 가셨어요.
그저께 가 봤는데 전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때 병원으로 모시고 갈 껄 잘못했나봐요.” 하는 소리를 듣고
“영안실이 너무 외롭고 쓸쓸할 것 같으니 
우선 꽃바구니나 하나씩 보냅시다.” 하고
안동병원으로 가 봤드니 웬걸 
강아지 똥 권선생님, 종치기 권 집사님은 우린 손도 잡아보기 힘들만큼 
유명인들이 보낸 대형 화환과 많은 조문객들에게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큼직하게 박아 놓은 판화속의 
목이 가늘고 눈빛이 깊고 머언 님의 모습은 왜 그리 외로워 보였을까요?
또 왜 그리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듯 안쓰러워 하는 듯 보였을까요.

장례식은 주일날
예배당 종치기 집사였던 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예수쟁이들의 말을
장례를 주관하던 작가회에서 받아들여서
천사같이 흰 티를 입은 노하동 우리집 아이들의 찬송으로  
님이 가는 먼 길을 우리도 언젠가는 뒤따라 가리라며 전송했습니다.

그리고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혹은 무리지어 당신을 찾아왔지만
님은 산골아이의 꿈이 살던 머언 하늘에서
「무명저고리와 엄마」의 그 한이 서린 하늘나라에서
이기심과 헛된 욕망에 속절없이 젖어들고
세상 풍조에 흔들리며 하찮은 세상살이에 혼이 빠진 우리들을 
아직도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신 예수님처럼
지금도 안타까와하며 측은히 여기며 외로워하고 있겠지요.
강아지 똥의 사랑으로 고운 꽃을 피우고 예쁘게 웃던 민들레 꽃씨는 
금년에도 세월의 바람을 타고 하늘의 바람을 타고 
님이 치던 예배당 종소리처럼 산기슭으로 들녘으로 개울가로 날아가고 있는데
아직도 님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고 겉도는 우리가 미안합니다.
시간이 더 가고 세월이 더 가도 영영 
님의 그 안타까움과 외로움을 덜어주지 못할 것 같아서 
마냥 죄송합니다.

                                              2008년 5월 7일 새벽에
                                                  산골아이 장세문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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